더러운 벌레들, 역겨운 체액과 내장, 너저분한 혈관과 피 그리고 뼈다귀와 해골들로 채워진 화면,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작품에서처럼 기괴하게 재조립된 인형, 난잡한 성행위들... 그림 <당신 곁을 맴돕니다>(1999)에서 보면 그러한 비천한 몸의 소우주가 마치 파노라마적 정경처럼 펼쳐진다. 이들은 모두 사회화, 분리, 성별화(sexuation)가 되지 않은 몸의 이미지, 즉 자끄 라깡(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면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몸’의 이미지들이다. 김 원 방 _미술평론가
수년의 침묵을 깨고 낯설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 김두진의 디지털 이미지는 충격이다. 미학의 시각적 아우라 따위 필요치 않다는 듯 거의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린 장면은 먹먹한 어둠과 뼈뿐이다. 어둠은 뼈의 형상을 제외한 모든 것을 먹었다. 뼈의 형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실마리도 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 엿보인다. 깊은 어둠과 푸른 뼈, 그 심연(深淵)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뼈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김종길_미술평론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두진은 20대 후반 무렵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등을 통해 폭넓은 시각적 연구를 해오던 그가 이후 몇 년간의 공백 끝에 공개한 3D 그래픽 작업은 이전에 비해 더욱 과감한 시도로 보여졌다. 그의 새로운 형식의 작품에는 이전 작품에서 나타나는 형태나 색채의 강렬함은 절제되었지만, 단순화된 객체들의 조화가 전해주는 보다 뚜렷한 아우라가 존재한다. 작가는 지속해서 발전하는 매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내적 이야기에 적합한 외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기나긴 형식적 과도기를 겪으면서도 그가 한결같이 집중한 주제는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다. 형식이 변화하여도 작가는 여전히 그 본질적 주제를 지켜나가고 있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탐구하고 있다. 3D 그래픽으로 작업하여 인쇄한 그의 신작들은 이전의 회화, 조각, 사진, 영상, 그 모든 형식과 닮아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표현 방식은 관객들에게 다소 모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통속적인 영역들에 속하지 않을 뿐, 3D 그래픽은 분명 하나의 장르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진다. 작가의 표현방식에서 보여지는 이와 같은 존재의 낯섦과 소속의 모호함은 자신의 삶을 비롯한 작품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김두진은 유럽의 고전 명화 속 인물들의 피부를 벗기고 그 안의 뼈대를 상상하여 3D 그래픽으로 구현한다. 현대미술의 홍수 속에 마르셸 뒤샹,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등 수많은 작가들이 ‘차용과 변용’이라는 이름 아래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 역시 나름의 명분을 지니고 있음에도 항상 그 의의보다는 해학적 양상이 두드러졌었다. 반면, 김두진의 차용은 그 동안 행해졌던 그 어떠한 패러디보다도 명확한 주제의식을 띠고 있다. 작품 안에서 신체와 정체성,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 또한 그 속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는 작가에게 명화 속 인물들은 더없이 좋은 재료이다. 명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적인 요소의 강조를 위해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 본 바탕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감정을 기초로 한다. 신화는 삶, 죽음, 사랑, 갈등과 같은 인간 삶의 통속적인 이야기들에 살을 붙여 매혹적으로 발전시킨 형태이다. 즉, 인간 존재와 서로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사회적 통념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김두진의 작업은 명화가 담고 있는 이러한 통념들을 걷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외피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인물들은 피부뿐 아니라 그 정체성까지 상실한다. 뼈대만 남은 신체는 성별, 인종, 외모, 신분, 그 어떤 외형적 상태도 가늠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선다. 신체의 자세, 몸가짐, 움직임을 단서로 인물을 파악하려 노력해보아도 명확히 식별할 수는 없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마사치오의 <낙원에서의 추방>, 유명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도프의 <Ken Moody and Robert Sherman>에서 차용하여 재현하였다. 사실주의 작가로 잘 알려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여성의 음부를 실제처럼 묘사하여 여성성의 상징인 자궁을 연상시킨다. 김두진은 쿠르베의 그림에서 살을 걷어내고 뼈만 보여줌으로써 원작의 에로틱한 모습과 성의 구분을 동시에 배제시킨다. 동성애자 사진가로 유명한 메이플 도프의 <Ken Moody and Robert Sherman>을 차용한 작품에¼도 역시 원작에서 살을 제거하여 두 개의 두개골만 남아 인종과 성차적 특징이 모두 제거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작품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함에도 공공연히 행해지는 가시적 요소에 따른 구분과 편견에 반발하고 있다. 전시의 일부로 보여졌던 행위예술(performance art) <아주 평범한 커플> 또한 전시된 작품들과 어우러져 주제를 명확히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김두진은 일반적인 두 남성을 삼각형의 벤치 위에 제시한다. 이들은 미리 주어진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배우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몸짓이나 눈빛으로 표현한다. 나란히 앉은 두 남성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기류에 관객은 거부감을 가질 수도, 혹은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작가는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관객들의 반응을 관찰하고자 하며, 그 반응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는 대중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인 수많은 정체성들 또한 세상에 존재함을 말하려 한다. 이렇듯 모든 요소가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져 ‘정체성의 모호함’이라는 명확한 주제적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는 김두진의 전시는 ‘매우 훌륭한 작품’ 혹은 ‘우스꽝스럽거나 유별나서 시선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이라는 이중적 뜻의 <걸작>(傑作)이라는 전시 타이틀에서도 그의 완벽한 모호성을 엿볼 수 있다.
김두진 작가는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학과를 전공하였다. 작가는 1997년 서울 관훈갤러리의 기획전 <로고스와 파토스>전의 참여를 시작으로 2000년 세종문화회관 갤러리, 2001년 아르코 미술관, 2008년 백남준 아트센터 등에서 다수의 미디어 아트 전시를 선보이며 국내에 뉴미디어를 활용한 예술 형태를 꾸준히 소개해 왔다.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작가는 2010년 홍대앞 문화예술상인 <국제뉴미디어 페스티발상>을 수상하였으며 2011년 파주 아트 플랫폼과 2012년 서울 난지 창작스튜디오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바 있다.